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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가을 블로그

리뷰2022년 11월 01일--views

[리뷰]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허무주의와 무한다정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딸과 엄마의 대립이라는, 지극히 가족적인 이야기로 풀어질 수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부분이지 않나 싶습니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허무주의를 이기는 무한다정주의!! by 유튜브 댓글

친구에게 추천받은 영화입니다. 에브리.. 머시기로 시작하는, 한국어 없이 이름이 긴 영화로 처음 기억되었어요. 예고편도 포스터도 안봤습니다. 이렇게나 무관심한 태도의 이유? 기대가 없어야 재밌다는 법칙을 따르기 위함은 아니고, 여자친구를 따라 극장에 갈 뿐이며 영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별 생각이 없었어요. 엄밀히 이야기해서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관심을 측정하기 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나, 그렇지 않은가…? 애초에 친구의 추천은 큰 지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지도 모르겠네요.

처음에 갑자기 중국어가 흘러나와서 조금 당황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영어 번역 자막 색은 흰색이고, 중국어는 노란색이란 사실을 발견한 재미도 있었습니다.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가히 이 영화는 실험적인 것 투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초반의 정신없고 어수선한 분위기의 연출은 예술 영화로서의 불쾌함과, 뭔가 홍콩 영화에서 익숙했던 것 같은 쫍~은 느낌, 하여튼 흔치 않은 연출에서 오는 신선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합니다. 사운드도 강렬했어요. 빼애애앵~~ 드넓은 우주를 마주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주 사이를 넘나들 때의 시각 효과도 아주 그냥 번쩍번쩍했습니다. 중간에 무성 영화를 방불케 하는 장면도 있고, 하여튼 볼 거리는 넘쳐납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맥락이 있는데, 그것은 "평범함 거부"입니다. 영화 내에서 다른 차원과 연결하는 행위인 "점프"를 할 때의 트리거는 현재 맥락과 상관없는 별난 행동입니다. 이런 희한한 행동은 영화의 분위기를 무겁게 흘러가지 않도록 하면서도, 빌런인 조부 투파키의 "필연적" 어쩌구 하는 철학을 재치있게 밀어냅니다. 별난 행동은 우연한 것이기 때문이죠. 똥꼬에 트로피를 꽂아넣는다는 행동이 참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오지만, 어처구니없음 자체로 의미를 가지니까 당위성도 얻게 되고, 영화의 요소들이 잘 맞아떨어진다는 기분이 들며, 재미가 생겼습니다.

영화의 주제는 마음에 들어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온 우주를 경험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조부 투파키와, 마찬가지로 온 우주를 경험했지만 남편에 의해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고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는 결론을 내린 에블린은 서로 대립합니다. 필자 또한 이 우주의 의미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이런 주제는 오히려 수많은 창작물에서 다뤘기 때문에 흔하다고도 생각이 되지만, 그걸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태워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게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허무주의와 무한다정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딸과 엄마의 대립이라는, 지극히 가족적인 이야기로 풀어질 수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부분이지 않나 싶습니다.

에블린의 태도, 아니, 그 기원을 따져보자면 남편인 웨이먼드의 철학에 정말 공감을 합니다. 좀 더 어렵고 딱딱한 단어로는, "낙관적 허무주의" 라고 하는데, 하여튼 의미가 없다고 해서 허무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생각만 할 뿐이지, 그 철학을 잊어먹고 현실에 치여 힘들게 살아갈 때가 있는데, 이 영화가 좋은 환기가 되어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필자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의 한 영상인데, 낙관적 허무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소재로 보면 진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 우주의 존재 의미를 묻는 것도 흔하고, 엄마와 딸의 관계도 흔합니다. 조부 투파키가 에블린의 딸이었다는 게 밝혀진 시점부터 이미 결말은 정해졌습니다. 에블린은 세상과 화해하고, 조부 투파키는 딸로서 인정받는 엔딩. 하지만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어서 몰입하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허무주의 vs 낙관주의라는 주제를 밀어붙이는 힘이 아주 강력하며, 엄마와 딸의 관계에 집중하는 힘도 대단합니다. 아버지 웨이먼드와 딸 조이의 관계에 대해 기억나는 장면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의 중심은 에블린이며, 에블린의 시선으로 영화가 끝까지 이어집니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대박입니다. 특히 웨이먼드는 멀티버스에 따라서 성격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 거기서 오는 분위기가 정말 달라서, 이게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다소 B급이라서, 이런 느낌을 싫어한다면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무위키에서 이 영화의 정보를 가볍게 찾아보는데, 한국에서 비교적 늦게 개봉했다는 점이 기억에 남네요. 이미 세계적으로 좀 유명한 영화였다니. 그리고 이동진 평론가가 올해 평점 5개 준 영화 두 개 중 하나라는 것도 인상깊었습니다. 첫번째는 <헤어질 결심>이래요. 헤어질 결심도 봤지요. 호호~

주인공의 이름인 에블린. 에브리씽 이라는 영화 제목과 비슷해서 기억해내기가 쉽네요.

이 영화를 보기 하루 전 이태원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이별… 부모와 친구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통할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와 이태원 참사는 관련이 정말 하나도 없지만, 그냥 적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