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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가을 블로그

| 일상

회사에 싸움 걸기 다짐 중

사업을 더 번창시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금지된 className을 써서 에러가 나는 상황
사진: Unsplashby Johann Walter Bantz

인천 계양산에 엄청나게 많은 러브버그가 우와악 나왔습니다. 시민들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익충이냐 해충이냐 논란이 생겼습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신승관 교수님은 “해충과 익충의 명확한 기준은 없다. 그 기준은 인간 기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해충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란이 왜 생겼을까요? 우리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주입된 익충 가스라이팅에 의해 벌레 하나하나에도 권력이 부여되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모기는 그냥 죽이자”는 기조보다 “수컷 모기는 익충이라 죽일 필요가 없다”라는 지식이 살짝 우위에 있으면서 미묘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요.

권력. 책임과 의무. 인간 사회를 묘사할 때에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문화권, 특히 글로벌한 추세와 많이 빗겨나가 있는 소수민족의 문화를 묘사할 때도(예: 문화의 패턴(루스 베네딕트 저)) 그 구성원의 책임, 의무, 권리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나 스스로에겐 항상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역할에 대해 고민이 계속 듭니다. 지구 위에 두다리 걷는 지적 생명체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금 다니는 회사의 노사협의회 근로자측 대표로서, 팀원으로서 모두 “나는 어떤 역할일까”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직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떳떳히 고개를 들었는데요, 그러자 놀랍게도 회사 생활을 더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면접을 본다면 “이전 회사에서 어떤 노력을 해왔냐”는 질문을 받을 텐데, 그 때 답변을 잘 준비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내 또 다른 의문이 들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 회사에 도움이 되는 길일까? 당연히 아닙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잘 해야죠. 과거를 떠올렸을 때 “이렇게 말고 저렇게 해봤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더 올바른 방향이 존재했다는 사실(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이 나를 또 한차원 깊은 의문의 호수로 담궈버리네요.

회사 사업 방향은 결정권자에 달렸습니다. 이른바 C레벨. 그것이 그들의 역할이자 권한입니다. 회사 내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들이죠. 그런데 회사의 성과가 영 불만족스러울 때에는 책임 소재가 불분명합니다. 사업의 잘못된 방향이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일하는 사람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실패했는지는 검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업의 흥망엔 운이란 것도 굉장히 크게 작용합니다. 행운에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국제적인 기류에 의해 내가 피해를 봤으니 보상을 해달라! 혹은 너희가 이득을 봤으니 분배해라! 라는 목소리는 좀 터무니가 없어 보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권력을 쥐고 있는 C레벨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가 쉽고 성과 부족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에게 씌우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피해인가요? 사측과 노동자는 계약 관계입니다. 회사의 비전이 보이지 않고 전망이 나빠보인다면 회사를 떠나면 됩니다. 하지만 성과 중심적인 또다른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전 회사에서 그 어려운 와중에도 제 역할을 했다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나는 기존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해왔고 이 회사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회사의 잘못된 방향을 설득하려고 애썼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이사회가 결정한 방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야 할까요? 제기한다면 얼마나? 어떻게? 효과적인 수단은 무엇이지요?

평등의 짧은 역사(토마 피케티 저)라는 책을 읽다가 독일 회사에서는 이원적 이사회제도를 운영한다는 걸 알았습니다.(노동정책연구보고서 - 노동이사제 도입 시 문제점 참조). 독일에서는 이렇게나 급진적으로 회사가 운영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지만요). 크게 요약하면, 회사 방향의 결정에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음을 제도화 해놨다는 겁니다.

우리 회사의 규모에서는 그런 제도가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전체 인원이 채 100명도 되지 않으니까요. 회사의 매출이 큰 거래처와의 계약 성사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만큼 사업 방향 결정을 마냥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회사는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자체적인 신규 사업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저도 팀원으로서 참여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 사업의 성과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직을 앞두고 있는 나는 ‘회사에서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냐?’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업의 흥망을 크게 결정짓는 “방향”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개입한다는 말은 권력에 도전한다는 뜻입니다. 상대 권력의 정당성이 튼튼해 보이지 않으면 흠집내기는 쉽지 않을까요? 마치 러브버그는 익충이니 죽이면 안된다라는 말에 쉽게 반감이 드는 것처럼요.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기존에 쌓인 질서를 흔들려고 하니 거기에 심리적 장벽이 크게 있는 느낌입니다. 마치 독일의 그런 제도가 급진적으로 느껴진 것처럼요. 뭔 말을 하려고 하니 스트레스부터 받습니다. 나는 회사 경영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경험도 적고 주어진 정보도 제한적이라 그들의 반론에 쉽게 굴복할 것 같습니다.

나의 요구사항을 명확히 하는 것부터 해야겠습니다. 나는 뭘 원하는 걸까요? 다시 생각의 구렁텅이로 빠집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 중에 인상깊었던 메시지가 있었는데요, 절멸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면 소통과 협력을 통해 서로 이득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뭔가를 말하고, 요구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는 성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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